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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속에 노닐다

모차르트 명연 남긴 여성 피아니스트들


입력 : 2009-01-22 17:09:11수정 : 2009-06-18 18:22:34

피아노는 과연 남성의 악기일까. 얼마 전 해외에서 주로 활동하는 한국인 피아니스트와 얘기를 나눈 적이 있다. 그는 남자였고, 대화의 중심은 아무래도 피아니스트들에 대한 것이었다. 20세기 중반의 거장이었던 에드빈 피셔에서부터 길렐스, 리히테르 같은 러시아 출신의 비르투오소들, 또 최근의 예브게니 키신에 이르기까지 여러 피아니스트들을 도마에 올려놓고 한참이나 얘기를 나눴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그가 말했다. “피아노는 역시 남자의 악기죠. 여자들의 연주는 아무래도 한계가 있어요. 여성 피아니스트들이 들으면 기분 나쁘겠지만, 사실은 사실이죠.” 그 말이 끝나고 10분쯤 뒤 역시 피아니스트인 그의 아내가 카페로 들어섰다. 그는 언제 그랬냐는 듯 시침을 뚝 뗐다. 자신의 아내에게 “오늘 연습을 잘했냐?”고 묻는 그의 눈빛에 장난기가 살짝 어려 있었다.

그의 말은 일면 타당하다. 일단 피아노라는 악기는 덩치가 만만치 않다. 넓게 펼쳐진 88개의 건반을 훑어내리려면 어깨가 넓어야 하고 팔이나
손가락도 길어야 한다. 게다가 피아노는 태생적으로 타악기의 속성을 지닌다. 건반에 연결된 88개의 현을 해머로 두들겨 소리를 낸다. 이 메커니즘이 현대적으로 개량되는 과정에서, 악기의 음량을 키우기 위해 해머와 건반은 더 무거워졌다. 전신(前身)이었던 하프시코드에 비해 한층 완력을 필요로 하는 악기로 변해온 셈이다.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였던 라흐마니노프는 키가 2m에 가까웠고 손가락을 쫙 폈을 때 손의 길이가 30㎝에 이르렀다. 러시아의 거장 리히테르는 손가락 끝에서 피를 흘리며 건반을 두드리기도 했다. 1990년 세상을 떠난 쿠바 출신의 호르헤 볼레트(Jorge Bolet)는 손을 높이 들어올리지 않고도 상당히 중량감 넘치는 리스트 연주를 들려줬는데, 그것은 결국
손목의 힘이 좋다는 뜻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사진으로 확인해본 그의 손목은 뼈대가 엄청나게 굵다.

피아노가 남성에게 더 적합하다는 관념은 리스트, 라흐마니노프, 프로코피예프 같은 작곡가들의
음악에 이르는 순간, 여지없는 진실로 굳어질 가능성이 커진다. 이들의 음악은 넓은 음역을 변화무쌍하게 오가는 데다, 힘차게 코드를 짚어 연주하는 음의 뭉치들이 빈번히 등장한다. 아무래도 몸집이 크고 힘이 좋은 사람에게 유리하게 마련. 그러다보니 ‘피아노의 남성성’이라는 관념은 더욱 굳어질 수밖에.

그러나 피아노는 과연 남성의 악기일까? 꼭 그렇진 않은 것 같다. 그것은 연주하는 음악이 무엇이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 아닐까. 이를테면 모차르트의 음악은 어떨까. 그것은 부피와 무게를 덜어낸 투명한 텍스처에 도달하는 것이 관건일 터. 모차르트가 남긴 피아노 협주곡과 소나타에서 눈부신 활약을 보여준 연주자들 중에는 의외로 여성이 많다.

일단, 릴리 크라우스(1905~86)를 떠올려 보자. 그녀는 50년대를 대표했던 모차르트 스페셜리스트 가운데 한 명. <이 한장의 명반>의 저자 안동림씨(77)는 크라우스가 51세에
녹음했던 ‘모차르트 피아노 소나타 전곡’(EMI)을 명반의 반열에 올려놓고 있다. 10년 후 CBS에서 같은 음악을 다시 한 번 더 녹음했지만, 청신함과 영롱함에서 51세 때의 연주를 넘어서지 못한다는 평가다. 크라우스보다 10년 연상인 클라라 하스킬(1895~1960)은 신체적 장애에도 불구하고 모차르트의 진경(珍景)을 펼쳤던 피아니스트. 특히 세상을 떠나던 해에 녹음했던 피아노 협주곡 20번과 24번(필립스)이 오늘까지도 명연으로 빛난다. 또 두 여인보다 한 세대 뒤의 피아니스트인 잉그리드 헤블러(80). 그녀는 오스트리아 빈 태생답게 우아한 세련미와 따뜻한 음색의 연주를 펼쳤다. 특히 ‘피아노 협주곡’ 23번, 24번, 26번을 비롯해 ‘피아노 4중주’ 1, 2번 등에서 명연을 남겼다.

영국에서 간행된 <죽기 전에 들어야 할 클래식 1001>은 일본 태생의 피아니스트 우치다 미쓰코 (內田光子·61)에게 후한 점수를 준다. 그녀가 91년 녹음했던 ‘피아노 소나타 전곡’(필립스)을 평하면서 “이것을 들으면 다른 음반은 더 이상 듣고 싶지 않다”고까지 극찬한다. ‘런던 파이낸셜 타임스’에서 음악평론가로 활동했던
맥스 로퍼트의 평가. 하지만 그것은 마리아 주앙 피레스(65)를 사모하는 애호가들이라면 발끈할 만한 얘기다. 포르투갈 출신의 그녀는 모차르트의 소나타 전곡을 두 번 녹음했고, 그중에서도 89~90년에 녹음한 두번째 음반(도이치그라모폰)이 수작으로 꼽힌다. 물 위에 떠 있는 듯한 영롱한 터치가 일품. 모차르트 음악의 관건이랄 수 있는 ‘투명한 텍스처’에 이만큼 도달한 연주도 드물지 않을까. 피아노가 남성의 악기라는 고정관념은 그렇게, ‘모차르트’라는 숲에 들어서는 순간 깨진다.

문학수 선임기자
sachim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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