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09-01-08-18:23:35ㅣ수정 : 2009-01-08 18:23:36
음악은 정신을 혼미하게 만드는 ‘독약’일까?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은 ‘때때로 그렇다’고 말했다. 그는 음악이 운율과 하모니를 통해 정신을 조화롭게 하고 감정을 순화시키기도 하지만, 지나치게 치우치면 사람을 유약하게 만들 뿐이라고 경고했다. 음악을 ‘하찮은 것’으로 여겼던 이 철학자는, 그렇게 나쁜 영향을 주는 음악을 지상에서 영원히 추방해야 한다고까지 설파했다.
음악에 대한 이 부정적 견해는 19세기 말 러시아의 소설가 톨스토이에게서 다시 발견된다. 19세기는 이른바 낭만의 시대. 베토벤 이후 점점 확고해진 음악의 절대성과 신성함이 반론의 여지없이 통용되던 때였다. 음악은 고통스러운 세계에서 구원으로 나아가는 문(쇼펜하워)이었고, 나약한 인간을 초인의 경지에 이를 수 있게 하는 통로(니체)였다. 톨스토이가 “음악이 인간을 파멸로 이끈다”고 말했던 때는, 바로 이렇게 유럽이 음악을 숭앙하던 시대의 끝자락이었다. 그것도 하필이면 낭만의 종주(宗主)로 통했던 베토벤의 음악, 그중에서도 바이올린 소나타 9번 ‘크로이처’가 도마에 올랐다.
소설 <크로이처 소나타>는 톨스토이가 59세였던 1887년에 집필을 시작해 2년 후 완성했던 중편 분량의 작품. 기차 안에서 만난 ‘나’와 고지식한 외모의 키 작은 남자 ‘포즈드니셰프’의 대화를 축으로 이야기가 흘러간다. 정확히 말하자면 나는 그저 듣는 입장일 뿐, 포즈드니셰프의 독백과도 같은 대사가 소설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포즈드니셰프는 아내를 살해한 남자. 치정살인은 “빌어먹을 음악 때문”에 일어났다. 아내와 다툼이 빈번했던 그는, 아마추어 피아니스트인 아내가 바이올리니스트 트루하체프스키와 소나타를 연습하는 모습을 보고는 불같은 질투에 사로잡힌다. 파리에서 돌아온 트루하체프스키는 “촉촉한 눈, 미소를 머금은 붉은 입술, 포마드를 바른 콧수염, 최신 유행의 머리 스타일”을 가진 매력남. 아내는 그를 만난 다음부터 얼굴에 생기가 돈다. 적어도 남편인 포즈드니셰프가 보기엔 그렇다. 그는 아내와 트루하체프스키가 파티장에서 소나타를 함께 연주하는 모습을 보고는, 두 사람이 “음악으로 맺어진 음욕의 관계”라고 확신한다. “그들은 ‘크로이처 소나타’를 연주했습니다. 처음 나오는 프레스토를 아세요? 이 소나타는 정말 무시무시합니다. 음악이 영혼을 고양시킨다는 건 헛소리이고 거짓말입니다. 음악은 영혼을 자극할 따름입니다. 에너지와 감정을 끌어올려 파멸로 이어지게 합니다.”
톨스토이 본인의 생각도 그랬다. 그는 <크로이처 소나타>의 후기에서 자신도 같은 의견임을 밝혔고, 소설 속의 여러 묘사를 통해 포즈드니셰프라는 인물에 작가의 모습이 상당히 투영됐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낭만적 음악에 대한 이 극단의 회의는 톨스토이의 오래된 음악 편력에서 비롯했을 터. 그는 음악을 들으며 눈물을 흘리던 지독한 애호가였고, 전문가 뺨치는 실력을 갖춘 피아니스트이기도 했다.
음악 때문에 빚어진 치명적 사랑은 헝가리의 작가 산도르 마라이(1900~1989)의 <열정>에도 등장한다. <크로이처 소나타>보다 반세기쯤 후 쓰여진 이 소설도 역시 독백체. 주인공 헨릭은 형제 같았던 친구 콘라드가 자신의 아내인 크리스티나와 연인 관계임을 깨닫고 배신감에 휩싸인다. 콘라드와 크리스티나를 맺어줬던 불륜의 끈도 역시 음악. 절망한 헨릭은 오두막에 칩거하고 크리스티나는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헨릭은 어느날 종적을 감춘 콘라드를 내내 기다리면서 노년을 맞고, 41년 후에야 나타난 친구 앞에서 이렇게 말한다. “자네와 크리스티나 사이에서 음악은 서로를 묶어주는 끈이었어. 나는 그 사이에서 끝내 고독했네. 음악은 자네와 크리스티나에겐 말을 했네. 나하고 대화가 끊겼을 때도 자네 두 사람은 서로 얘기를 할 수 있었다네. 나는 음악을 증오한다네.”
톨스토이가 “영혼을 자극하는 음악”이라 평했던 9번 ‘크로이처’는 베토벤이 남긴 10곡의 바이올린 소나타 가운데 가장 빈번히 연주되는 곡. 오이스트라흐와 레프 오보린의 연주가 오랜 세월 호평을 받았다. 두 남자의 협연이 너무 중후하고 고전적이라면, 기돈 크레머와 아르헤리치의 연주를 선택해도 좋다. 톨스토이가 언급했던 빠르고 격렬한 ‘프레스토’는 1악장과 3악장에 등장한다. 벼랑으로 떨어지는 파국의 느낌은 3악장에서 한층 짙다.
문학수 선임기자 sachimo@kyunghyang.com
음악은 정신을 혼미하게 만드는 ‘독약’일까?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은 ‘때때로 그렇다’고 말했다. 그는 음악이 운율과 하모니를 통해 정신을 조화롭게 하고 감정을 순화시키기도 하지만, 지나치게 치우치면 사람을 유약하게 만들 뿐이라고 경고했다. 음악을 ‘하찮은 것’으로 여겼던 이 철학자는, 그렇게 나쁜 영향을 주는 음악을 지상에서 영원히 추방해야 한다고까지 설파했다.
음악에 대한 이 부정적 견해는 19세기 말 러시아의 소설가 톨스토이에게서 다시 발견된다. 19세기는 이른바 낭만의 시대. 베토벤 이후 점점 확고해진 음악의 절대성과 신성함이 반론의 여지없이 통용되던 때였다. 음악은 고통스러운 세계에서 구원으로 나아가는 문(쇼펜하워)이었고, 나약한 인간을 초인의 경지에 이를 수 있게 하는 통로(니체)였다. 톨스토이가 “음악이 인간을 파멸로 이끈다”고 말했던 때는, 바로 이렇게 유럽이 음악을 숭앙하던 시대의 끝자락이었다. 그것도 하필이면 낭만의 종주(宗主)로 통했던 베토벤의 음악, 그중에서도 바이올린 소나타 9번 ‘크로이처’가 도마에 올랐다.
소설 <크로이처 소나타>는 톨스토이가 59세였던 1887년에 집필을 시작해 2년 후 완성했던 중편 분량의 작품. 기차 안에서 만난 ‘나’와 고지식한 외모의 키 작은 남자 ‘포즈드니셰프’의 대화를 축으로 이야기가 흘러간다. 정확히 말하자면 나는 그저 듣는 입장일 뿐, 포즈드니셰프의 독백과도 같은 대사가 소설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포즈드니셰프는 아내를 살해한 남자. 치정살인은 “빌어먹을 음악 때문”에 일어났다. 아내와 다툼이 빈번했던 그는, 아마추어 피아니스트인 아내가 바이올리니스트 트루하체프스키와 소나타를 연습하는 모습을 보고는 불같은 질투에 사로잡힌다. 파리에서 돌아온 트루하체프스키는 “촉촉한 눈, 미소를 머금은 붉은 입술, 포마드를 바른 콧수염, 최신 유행의 머리 스타일”을 가진 매력남. 아내는 그를 만난 다음부터 얼굴에 생기가 돈다. 적어도 남편인 포즈드니셰프가 보기엔 그렇다. 그는 아내와 트루하체프스키가 파티장에서 소나타를 함께 연주하는 모습을 보고는, 두 사람이 “음악으로 맺어진 음욕의 관계”라고 확신한다. “그들은 ‘크로이처 소나타’를 연주했습니다. 처음 나오는 프레스토를 아세요? 이 소나타는 정말 무시무시합니다. 음악이 영혼을 고양시킨다는 건 헛소리이고 거짓말입니다. 음악은 영혼을 자극할 따름입니다. 에너지와 감정을 끌어올려 파멸로 이어지게 합니다.”
톨스토이 본인의 생각도 그랬다. 그는 <크로이처 소나타>의 후기에서 자신도 같은 의견임을 밝혔고, 소설 속의 여러 묘사를 통해 포즈드니셰프라는 인물에 작가의 모습이 상당히 투영됐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낭만적 음악에 대한 이 극단의 회의는 톨스토이의 오래된 음악 편력에서 비롯했을 터. 그는 음악을 들으며 눈물을 흘리던 지독한 애호가였고, 전문가 뺨치는 실력을 갖춘 피아니스트이기도 했다.
음악 때문에 빚어진 치명적 사랑은 헝가리의 작가 산도르 마라이(1900~1989)의 <열정>에도 등장한다. <크로이처 소나타>보다 반세기쯤 후 쓰여진 이 소설도 역시 독백체. 주인공 헨릭은 형제 같았던 친구 콘라드가 자신의 아내인 크리스티나와 연인 관계임을 깨닫고 배신감에 휩싸인다. 콘라드와 크리스티나를 맺어줬던 불륜의 끈도 역시 음악. 절망한 헨릭은 오두막에 칩거하고 크리스티나는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헨릭은 어느날 종적을 감춘 콘라드를 내내 기다리면서 노년을 맞고, 41년 후에야 나타난 친구 앞에서 이렇게 말한다. “자네와 크리스티나 사이에서 음악은 서로를 묶어주는 끈이었어. 나는 그 사이에서 끝내 고독했네. 음악은 자네와 크리스티나에겐 말을 했네. 나하고 대화가 끊겼을 때도 자네 두 사람은 서로 얘기를 할 수 있었다네. 나는 음악을 증오한다네.”
톨스토이가 “영혼을 자극하는 음악”이라 평했던 9번 ‘크로이처’는 베토벤이 남긴 10곡의 바이올린 소나타 가운데 가장 빈번히 연주되는 곡. 오이스트라흐와 레프 오보린의 연주가 오랜 세월 호평을 받았다. 두 남자의 협연이 너무 중후하고 고전적이라면, 기돈 크레머와 아르헤리치의 연주를 선택해도 좋다. 톨스토이가 언급했던 빠르고 격렬한 ‘프레스토’는 1악장과 3악장에 등장한다. 벼랑으로 떨어지는 파국의 느낌은 3악장에서 한층 짙다.
문학수 선임기자 sachim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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