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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속에 노닐다

바르샤바 생존자들이 부르는 시온의 노래

입력 : 2009-01-15-17:10:50수정 : 2009-01-15 17:10:52

“끊임없이 ‘타자’를 상상하고, 그들과의 차이를 강조해, 그것을 배제하면서, ‘우리’라는 일체감을 굳혀가는 것.” 도쿄경제대 교수이자 에세이스트인 서경식은 <디아스포라 기행>(돌베개)에서 그렇게 쓰고 있다. ‘내셔널리즘’이라는 근대적 상상력에 대한 비판적 언급의 일부다. 종국에는 파괴와 살육을 부채질하게 될 이 부정적 상상력은, 자본주의적 인간관계에서 왜곡된 처세술로 통용되기도 한다. 언젠가 시내의 한 대형서점에서 잠시 들여다봤던 처세술 책에는, “지금 맞은편에 있는 사람을 내 편으로 만들려면 제3자를 함께 헐뜯으라”고 쓰여 있었다.


그 비뚤어진 상상력의 극치를 최근에 질리도록 목격하고 있다. 며칠 전 외신으로 들어온 두 컷의 사진. 그중 하나는 이스라엘과 가자지구의 접경에 주둔 중인 이스라엘 군인들이 출정 구호를 외치는 장면이다. 운동경기에 출전한 선수들이 “파이팅!”을 외치는 모습과 너무나 닮았다. 또 한 컷의 사진은 돌배기쯤 돼 보이는 팔레스타인 아기가 병원으로 이송되는 장면. 아기의 얼굴은 피범벅이다. 가련한 천사는 그토록 급박한 상황에서도 맑고 아름다운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다. 심란하다. 그날부터 음악을 듣는 ‘짓’이 불편하고 버거울 뿐이다.

지금 가자지구를 폭격하고 있는 이스라엘도 한때 광기어린 순혈주의의 희생양이 아니었던가. 앞서 언급한 <디아스포라 기행>에 등장하는 장 아메리(1912~78)라는 유대인. 그는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난 철학자이자 문인이었다. 그는 독일문화 속에서 자아를 형성했던 지식인이었고, 의심의 여지없이 자신을 ‘독일인’으로 생각했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갇히면서 그의 자아는 분열한다. 예컨대 이랬다.

“내가 의지하려고 하는 (정신적) 기반은 모두 적의 것이었다. 예를 들어 베토벤. 그 베토벤을 베를린에서 푸르트벵글러가 지휘하고 있었다. 대지휘자 푸르트벵글러는 제국의 명사였다. 메르젠부르크의 격언시에서 고트프리트 벤에 이르기까지, 17세기 음악가 북스테후드에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에 이르기까지, 정신의 유산과 미적 자산은 고스란히 적의 수중에 있었다. 어느날 나는 어리석게도 내 직업을 ‘독일문학자’라고 말했다가 친위대원에게 노여움을 사 죽도록 얻어맞았다.”

나치 친위대원의 분노. 짐작하건대 그것은 “유대인이 감히 ‘독일문학자’를 사칭하다니!”였을 것이다. 그래서 숱한 유대인 음악가들이 광기에 사로잡힌 악령의 눈길로부터 벗어나야 했다. 히틀러가 권력을 잡았던 1933년에 독일을 탈출한 유대인 음악가는 자그마치 4000여명. 그중 한 사람이었던 쇤베르크(1874~1951·사진)는 일찌감치 나치의
공포를 예견했던 음악가였다. 그는 ‘프로이센 아카데미’ 교수로 독일 내에서 적잖은 영향력을 행사했던 음악계 명사였지만, 망설임없이 독일을 떠나 미국 보스턴으로 몸을 숨겼다. 그렇다면 독일에서의 쇤베르크는 과연 어땠는가. 그는 바흐, 베토벤, 브람스를 잇는 독일 음악의 적자(嫡子)를 자처했고, 자신으로 인해 독일 음악의 헤게모니가 앞으로 100년은 더 지속될 수 있다고 자부했던 사람이었다. 그토록 ‘충성스러웠던’ 유대계 독일인조차도 독일땅에서 내쫓기고 말았다.

12음 기법으로 20세기 음악사에 절대적 영향을 미쳤던 쇤베르크. 그가 1947년에 작곡했던 ‘바르샤바의 생존자’라는 곡이 있다. 이 곡은 나치의 횡포에 숨진 수많은 ‘동족’들에게 바치는 음악적 애도사였다. 악몽 같은 공포와 비통함을 고스란히 담은, 20세기 음악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진술로 꼽히는 음악. 하지만 이스라엘의 폭격으로 팔레스타인의 아이들이 속절없이 죽어가고 있는 지금, 이 음악을 아무 거리낌없이 대면한다는 게 얼마나 가능할까.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갇힌 장 아메리의 절규가 다시 떠오른다. “베토벤은 적의 것이었다.”

문학수 선임기자
sachim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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