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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속에 노닐다

FM라디오, 착하고 친절한 음악 친구

입력 : 2009-02-12 17:07:35수정 : 2009-02-12 17:07:38

어떤 이들은 45만원을 내고 베를린 필하모닉의 연주회를 보러 간다. 또 어떤 이들은 45만원으로 한 달을 산다. 이 격차는 사라질 기미가 통 보이질 않는다. 오히려 해가 갈수록 커질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음악 듣기를 포기할 필요는 없다. 수십만원, 적어도 10만원이 훌쩍 넘는 연주회를 갈 수 없다고 해서 기죽을 필요도 없다. 당신이 진정 음악을 사랑한다면, 그리고 경제적으로 좀 쪼들리는 형편이라면, 용돈을 아끼고 아껴서 한 달에 한 번쯤 음반가게에 들러보는 게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다. 시간과 더불어 소멸하는 연주를 ‘녹음’이라는 테크놀로지에 가둬놓은 탓에 현장감은 당연히 부족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음반의 미덕은 적지않다. 45만원짜리 베를린 필하모닉의 연주를 1만원으로 들을 수 있다는 것은 누가 보더라도 밑지지 않는 선택 아닌가. 게다가 지휘자의 해석과 악단의 연주력을 정확하게 분별해가며 들을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여러 번 반복해 들을 수 있다는 것이야말로 음반의 탁월한 미덕이다.

또 다른 대안도 있다. 수십년간 음악문화의 첨병이었던 매체, 바로 라디오다. 영국의 BBC처럼 뛰어난 전문성과 콘텐츠를 갖추진 못했어도, 한국에도 ‘KBS 클래식FM’이라는 방송이 존재한다. 물론 몇가지 아쉬움은 있다. 대중적 인기를 고려해 선정된 일부 DJ들의 미숙한 진행, 미리미리 왕창 녹음했다가 한 편씩 방송하는 것, 클래식FM이라는 정체성에 걸맞지 않은 엉뚱한 음악 틀기 등이다. 그래도 KBS 클래식FM이 있어 다행스럽다. 이것은 당신의 주머니에서 한푼도 가져가지 않는다. 아무런 직접
투자 없이도 음악을 즐길 수 있게 해준다. 듣고 싶은 음악이 언제나 흘러나오는 건 아니지만, 예정된 프로그램을 미리 확인하는 노력을 조금만 기울인다면, 최고의 연주회를 내 방에서 편안하게 만나는 즐거움을 누리게 해준다.

애호가들에게 특히 호평받는 것은 <실황음악회>와 <명연주 명음반>일 터. 이 두 개의 프로그램은 ‘골수’ 청취자가 가장 많다. 게다가 방송할 선곡들을
인터넷으로 미리 공개해 청취자의 선택에 도움을 주는 친절함도 갖췄다.

<실황음악회>의 2월 방송분 가운데 놓치기 아까운 연주. 바이올리니스트 율리아 피셔(26·사진)의 이름이 눈에 띈다. 지난해 4월 덴마크의 코펜하겐 라디오 콘서트홀에서 있었던 실황. 베토벤의 ‘바이올린 협주곡 D장조’다. 얼마 전 우리나라에 다녀갔던 마렉 야노프스키(70)가 지휘하는 덴마크 국립교향악단과의 협연이다.

독일 뮌헨 태생의 피셔는 현재 가장 주목받는 바이올리니스트다. 네델란드의 ‘펜타톤’(Pentatone) 레이블에서 내놓은 8장의 음반은, 이 젊은 아가씨가 20대 초반에 이미 ‘성숙한 음악가’의 경지에 올랐음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그녀의 연주에는 인기를 끌어보려는 조급함이나 기교의 과시 같은 것들이 없다. 그래서 담백하다. 아직 어린 나이를 감안한다면 놀라울 정도의 절제력이다. 소리를 멋지게 내보려는 과시를 뛰어넘어 음악 전체를 조감하는 통찰력, 부드러움과 강함, 곡선과 직선의 유려한 어우러짐. 그것이 피셔의 음악이다.

더욱 놀라운 건 그녀가 피아니스트로도 데뷔했다는 점이다. 지난해 1월1일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융에 도이치 필하모닉과 가졌던 신년음악회. 그녀는 그리그의 ‘피아노 협주곡 a단조’를 연주해낸 다음, 다시 바이올린을 들고 생상스의 ‘협주곡 3번’을 연주했다. 관객들은 평생 처음 보는 이 ‘놀라운 장면’ 앞에서 뜨거운 박수를 멈추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피셔의 ‘더블 플레이’는 1회용 깜짝쇼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녀는 누누이 “나는 다만 바이올리니스트로 먼저 데뷔했을 뿐”이라며 피아노에 대한 애착을 보여왔고,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를 가장 존경한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펜타톤에서 나온 피셔의 레코딩 가운데, 가장 먼저 만나야 할 것은 ‘러시안 바이올린 협주곡’이다. 2005년 ‘그라모폰 에디터스 초이스’를 비롯해 ‘음악의 쇼크상’ 등 다수의 음반상을 휩쓸었다. 바흐의 ‘소나타와 파르티타’, 모차르트의 ‘협주곡 1~5번’, 브람스의 ‘바이올린 협주곡 D장조’와 ‘더블 콘체르토’ 등도 콜렉터 아이템으로 꼽을 만하다. 그러나 그보다, 16일 KBS에서 방송되는 피셔의 연주실황을 들어보는 게 먼저겠다. 왜? ‘공짜’니까.

문학수 선임기자
sachim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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