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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속에 노닐다

브렌델, 마침내 무대에서 내려오다

입력 : 2008-12-18 17:33:27수정 : 2008-12-18 17:33:30

알프레트 브렌델(77)이 떠났다. 18일 저녁 오스트리아 빈의 무지크페라인 홀. “올해를 마지막으로 연주활동을 접겠다”고 이미 선언했던 브렌델이 생애 마지막 연주를 펼쳤다. 20세기 후반의 피아노 음악을 이끌어온 거장. 언제나 신뢰할 수 있었던 브렌델의 진지한 피아니즘이 마침내 ‘과거’라는 시간 속으로 떠났다.

 
7년 전 프랑스의 음악잡지 <피아니스트>와 진행했던 인터뷰. 그것을 다시 들춰본다. 당시 70세의 브렌델이 ‘늙음’에 대해 담담하게 말한다. “사람이 늙으면 체력에 한계가 오는 법이지요. 이제 내가 하고 싶은 연주만을 선택할 겁니다. 연주회 요구에 휘둘리지 않는 게 잘 늙어가는 방법이지요. 내 육체가 앞으로도 잘 버텨 주었으면 좋겠어요.” 이렇게 말문을 연 그는, 자신의 음악관을 ‘전통주의자’라는 한마디로 요약한다. “나는 ‘작품’이 연주자에게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이미 가르쳐주고 있다고 믿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전통주의자’에 속하지요. 연주자는 작품을 좌지우지해선 안되고, 작곡가가 그렇게 썼으리라 지레 짐작해서도 안됩니다.… 연주자의 일생은 파라독스로 가득차 있어요. 작곡가의 의도를 존중하면서도 음악을 창조해야 하니까요.”

브렌델은 초절기교의 비르투오소가 아니었다. 눈부신 개성을 뽐내는 스타일리스트도 아니었다. 그는 청중을 자극할 만한 어떤 ‘포즈’를 갖고 있지 않았으며, 언제나 작품의 본래적 언어에 충실했다. 섬세한 프레이즈에 도달했을 때 건반을 향해 살짝 기울어지던 머리, 피아노가 선율을
노래하는 장면에서 멀리 허공을 바라보던 눈빛…. 그것이 브렌델이 보여준 포즈의 전부였다.

그래서 브렌델은 대기만성일 수밖에 없었다. 1931년 당시 체코 땅이었던 모라비아에서 태어난 그는 일찌감치 오스트리아로 이주해 피아니스트의 길에 들어섰지만, 이른바 ‘빈 3총사’로 불리던 프리드리히 굴다, 파울 바두라 스코다, 외르크 데무스 등 또래의 피아니스트들보다 한수 아래 취급을 받아야 했다. 젊은 시절의 그는 그렇게, 눈에 띄지 않는 사람이었다. 1963년 미국 무대에도 데뷔했지만 그를 불러주는 메이저 음반사는 한 곳도 없었다. 몇 군데 마이너 레이블에서만 그에게
녹음 기회를 줬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는 음반사 ‘복스’에서 베토벤 소나타 전곡을 녹음하는 등, 그저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갔다.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가던 인생. 그것은 어느날 갑자기 ‘점프’한다. 브렌델도 그랬다. 이 ‘견고한 구조주의자’에게 음악계의 스포트라이트가 쏠린 건 70년대에 들어서면서였다. 어느덧 그는 40대였다. 그는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젊었을 때 내 연주는 그리 화제를 모은 편이 아니었습니다. 나는 한발씩 전진했지요. 그러던 어느날, 영국 런던의 퀸 엘리자베스 홀에서 연주했을 때, 그날의 연주회는 나 스스로 만족할 만한 것도 아니었고
프로그램 자체도 밋밋했어요. 그런데 연주회 다음날, 세군데 음반사로부터 제안을 받았어요. 갑작스레 물이 끓어올라 온도계의 눈금이 확 치솟는 느낌에 휩싸였지요.”

앞서 언급한 인터뷰에서 했던 말이다. 그래서 그는 10년쯤 연하인 마르타 아르헤르치, 마우리치오 폴리니와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20세기 후반의 피아노 음악을 이끌었다. 그리고 마침내 18일, 연주 인생 60년의 마침표를 찍었다.

4권의 에세이집을 쓴 음악비평가이자 2권의
시집을 낸 시인 브렌델. 이 전인적 피아니스트의 부재에 대한 아쉬움 때문일까. 최근 국내에 수입된 35장짜리 CD세트 <알프레드 브렌델>이 1주일도 안돼 동이 났다. 네덜란드의 음반사 브릴리언트가 내놓은 전집. 브렌델에게 아직 세간의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지기 전이었던, 58~70년의 녹음들이다. 곧 재수입될 전망이다.

문학수 선임기자
sachim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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