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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속에 노닐다

라흐마니노프, 찬란한 서정의 광휘

입력 : 2008-12-11 17:30:15수정 : 2008-12-11 17:30:16

러시아의 작곡가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는 19세기 후반에 태어나 거의 20세기 중반까지 살았다. 덕분에 남아 있는 사진이 적지 않다. 하지만 그가 웃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198㎝의 껑충한 키에 늘 굳어 있는 얼굴. 피아니스트 리히테르는 러시아의 작곡가 쇼스타코비치가 얼마나 내성적인 사람인가를 회고했던 적이 있지만, 그보다 한 세대 앞선 라흐마니노프는 한층 더 우울한 초상을 후대에 남겼다. 그는 꼭 필요한 얘기가 아니면 하루 종일 거의 입을 열지 않았고, 우스갯소리 따위는 아예 자신의 ‘사전’에 올려놓지도 않았던 사람이었다.

마침 KBS 클래식FM에서 14일부터 6일간 ‘라흐마니노프의 밤’이라는 특집을 마련하는 모양이다. 진행자인 정준호씨가 보내온 e메일 속에 라흐마니노프의 ‘지독한 내향성’에 대한 스트라빈스키의 회상이 담겨 있어 눈에 띈다. 내용을 소개하자면 대략 이렇다.

라흐마니노프는 조국 러시아를 떠나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말년을 보냈다. 같은 동네에 역시 러시아를 떠나온 스트라빈스키가 살았다. 두 사람이
부부 동반으로 식사를 하던 중, 라흐마니노프의 아내가 스트라빈스키에게 물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뭘 하세요?” 스트라빈스키가 대답했다. “운동을 하고 샤워를 하지요.” 그러자 라흐마니노프의 아내가 남편에게 투덜댔다. “거봐요. 운동을 하고 샤워도 한다잖아요. 얼마나 멋져요. 당신은 부끄럽지도 않아요? 산책도 싫어하는 게으른 양반아!” 하지만 라흐마니노프는 묵묵부답. 그는 겸연쩍게 웃지도 않고 인상을 찡그리지도 않은 채, 그저 식사만 했다고 한다.

이 장면은 맞은편에 앉아 있던 스트라빈스키에게 약간 불편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핀잔을 들으면서도 말없이 밥만 먹던 라흐마니노프의 모습을 오래도록 잊지 못했던 모양이다. 그는 훗날 자신의 제자인 로버트 크래프트에게 이 일화를 들려줬고, 그것은 스트라빈스키의 회고록에 실렸다. 그 책에는 이런 얘기도 있다. “한 번은 우리집 현관 앞에 꿀을 두고 갔어. 너무 늦은 시간이어서 폐가 될 거라고 생각했나봐. 말없이 꿀만 놓고 갔더라고.”

내성적일 뿐 아니라 남에게 ‘민폐’ 끼치는 걸 극도로 싫어했던 라흐마니노프. 이런 특별한 성정(性情)은 아마도 유년시절에 형성됐을 것이다. 라흐마니노프는 유서깊은 타타르계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지만, 퇴역 장교였던 그의 아버지가 거의 ‘난봉꾼’ 수준이었던 모양이다. 그 아버지는 이리저리
사업을 벌인다며 집안의 재산을 탕진했고, 아내와도 끝없이 불화를 겪다 결국 이혼하고 말았다. 그런 까닭에 라흐마니노프는 어려서부터 부모와 떨어져 살며 외로운 시절을 겪었다. 게다가 누이가 디프테리아로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소년의 외로움과 우울은 더욱 커졌을 것이다. 1897년에 ‘교향곡 1번’이 혹평받은 후, 심각한 우울증에 시달리며 정신과 치료까지 받아야 했던 라흐마니노프의 내면에는, 이렇게 유년의 ‘트라우마’가 자리해 있었던 것이다.

작곡가, 지휘자, 편곡자이자 피아니스트였던 라흐마니노프. 그는 20세기 음악사에서 보기 드문 ‘멀티 플레이어’였다. 그는 20세기의 새로운 흐름에 눈을 돌리지 않은 채 19세기적 음악어법을 끝까지 고수했던 음악적 보수주의자였으며, 찬란한 서정의 광휘를 인생의 마지막까지 꿈꿨던 ‘골수 낭만주의자’였다.

손가락을 쫙 펴면 손의 길이가 30㎝에 이르렀다는 라흐마니노프. 고국을 떠난 그는 미국 땅에서 살면서부터 작곡가보다는 피아니스트로서의 활동에 집중해야 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생계’ 때문이었다. 1943년 로스앤젤레스의 한 병원에서 죽음을 기다리던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사랑하는 나의 손이여, 잘 있거라. 가여운 손이여!” KBS 클래식FM ‘실황음악회’가 14일부터 방송하는 곡들은 교향곡과 피아노협주곡 전곡. 합창교향곡 ‘종’도 방송된다. 최근의 명연과 더불어 라흐마니노프의 굴곡진 생애를 만날 수 있다.

문학수 선임기자
sachim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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