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음악 속에 노닐다

느리고 무겁게... 음악 속으로 걸어간 거장

입력 : 2008-11-20 17:19:41수정 : 2008-11-20 17:19:59

피아니스트 스비야토슬라프 리히테르(Sviatoslav Richter·1915~97)의 러시아식 애칭은 ‘슬라바’다. 지난해 4월 세상을 떠난 첼리스트 로스트로포비치도 같은 애칭으로 불렸다. 하지만 이 둘은 성품과 음악적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첼로의 슬라바가 호방하게 뻗어나가는 외향적 음악을 들려줬던 반면에, 피아노의 슬라바는 엄청난 집중력으로 자신과 싸우는 내향적 연주를 보여줬다. 무대로 걸어나올 때의 모습도 아주 달랐다. 로스트로포비치는 뛰어들듯이 성큼성큼 무대 중앙으로 걸어나왔지만, 리히테르는 조용히, 느리게 걸어나와 피아노 앞에 앉고는 했다. 그는 고개를 잠깐 숙여 청중에게 인사한 다음, 아예 눈길을 객석 쪽으로 돌리지도 않았다.


어쩌면 그것은 청중에 대한 무시, 혹은 오만으로 비칠 수도 있는 행동이었다. 리히테르는 심지어 “나는 나 자신을 위해 연주한다. 나는 청중에 대해 아무 관심이 없다”고 털어놓은 적도 있었다. 전기작가인 브뤼노 몽생종과의 인터뷰에서 했던 말이다. 하지만 리히테르를 ‘오만한 연주자’라고 손가락질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것은 청중에 대한 무시라기보다, 무념의 상태에서 음악에만 집중하겠다는 의지에 가까웠다. 그래야 청중도 제대로 된 음악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이 리히테르의 뜻이었다.

조명이 휘황한 콘서트홀을 좋아하지 않았던 피아니스트. 그래서 그를 떠올릴 때마다, 객석과 무대가 완전히 암전된 상태에서 악보와 건반만을 비추는
불빛에 의지해 연주하던 모습이 함께 떠오른다. 말년의 리히테르는 그렇게, “불을 꺼달라”고 요청하곤 했다. 그리고 71세였던 1986년, 그는 자동차 한 대로 러시아를 횡단하면서 궁벽진 마을들을 찾아다녔다. 레닌그라드에서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이어졌던 여정. 리히테르는 그렇게, 러시아의 외진 곳을 찾아다니며 91회의 연주회를 치러냈다. 그는 성미 까다롭게 ‘내 피아노’를 고집하지 않았으며, 시골 성당의 낡은 피아노로 연주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심지어 조율이 안된 피아노로도 감동적인 연주를 선보였다고 전해진다.

고집과 당당함, 느리고 무겁고 선이 굵은 연주. 11년 전 타계한 리히테르는 그렇게, ‘황소’ 같은 이미지의 피아니스트로 남았다. 그는 청중에게 멋지게 보이려는 겉치레를 털어내고 오로지 음악에 집중했으며, 세속적 성공에 눈 돌리지 않고 결벽증에 가까운 꼿꼿함을 보여줬다.

지난주 ‘주제와 변주’에서 언급했던 슈베르트의 소나타 ‘B플랫 장조 D.960’. 리히테르는 슈베르트가 세상을 떠나기 두 달 전에 남긴 이 소나타에서도 역시 특유의 피아니즘을 보여준다. 극단적으로 느린 걸음의 1악장, ‘두루루룽’ 하고 울려나오는 왼손 저음부의 트릴이 묵직하다. “슈베르트 음악은 눈물
콧물 짜는 신파”라며 ‘악담’을 퍼붓는 이들은 2악장을 한번 들어볼 일이다. 어둡게 흐르는 비애감, 하지만 센티멘털로 추락하지 않는 정신적 긴장감. 이만하면 숙연하지 않은가.

이 곡의 명연을 남긴 또 다른 이들로는 빌헬름 켐프, 루돌프 제르킨, 알프레드 브렌델이 떠오른다. 켐프의 65년
녹음은 섬세하다. 하지만 리히테르와 비교하자면 선이 가늘고 힘이 없다는 인상을 준다. 반대로 제르킨의 75년 녹음은 힘이 넘친다. 고조되는 프레이즈에서 너무 세차게 달려나간다는 느낌마저 든다. 피아노 소리에 간간이 섞인 거친 숨소리를 함께 듣노라면 더욱 그렇다. 얼마전 은퇴를 선언한 브렌델은 네 명 가운데 가장 ‘달변’의 연주. 음색도 리히테르나 켐프에 비해 환하다. 그런데 슈베르트의 ‘마지막 소나타’를 이렇게 유창하게 묘사해도 되는 것일까.

타계한 두 거장과 77세의 노대가에게는 살짝 미안하지만, 오늘은 리히테르가 연주한 슈베르트의 D.960을 권한다. 61년 11월, 모스크바에서 있었던 연주회. 프라하 실황음반을 구하기 어려워진 지금, 이것이 하나의 대안이 될 성싶다. 네덜란드의 브릴리언트가 발매한 <스비야토슬라프 리히테르 인 콘서트>(사진)에 수록돼 있다. 5장의 CD로 이뤄진 이 음반에는 슈베르트 외에 베토벤과 리스트의 소나타들도 함께 담겼다. 가격도 저렴하다.

문학수 선임기자
sachimo@kyunghyang.com
ⓒ 경향신문 & 경향닷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