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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속에 노닐다

동양과 서양, 신과 인간... 거대한 벽화로 그리다

입력 : 2008-12-04 17:21:38수정 : 2008-12-04 17:21:38

올리비에 메시앙 '아기 예수를 바라보는 스무개의 시선'

1941년 초, 그는 갇혀 있었다. 프랑스군으로 참전했다가 나치에게 붙잡힌 포로 신세였다. 폴란드 서남부와 체코 동북부에 걸쳐 있는 슐레지엔 지역의 괴를리츠(Goerlitz) 수용소. ‘시간의 종말을 위한 4중주’는 그 담장 안에서 작곡돼 초연됐다. 1월15일이었다. 3명의 수용소 동료와 4중주를 초연했던 당시 상황을, 그는 훗날 이렇게 회고했다. “살을 에듯 추웠다. 수용소 전체가 눈에 묻힌 상태였다. 3만명에 이르는 포로들은 주로 프랑스인들이었고 폴란드, 벨기에인들도 일부 있었다. 악기는 엉망이었다. 첼로는 현이 세 개뿐이었고, 내가 연주할 피아노의 오른쪽 건반은 누를 수는 있었지만 다시 튀어오르지 않았다. 나는 넝마 같은 초록 재킷을 걸치고 나무 고랑을 차고 있었다.”

 
현대음악의 ‘성자’로 불리는 올리비에 메시앙(1908~92)의 회고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고 있는 이 전설적인 일화는, 이제 20세기 음악사의 ‘명장면’으로 남았다. 올해가 바로 메시앙 탄생 100주년. 그의 조국 프랑스는 올해를 ‘메시앙의 해’로 선포해 기념했고 세계 곳곳에서 그를 기리는 연주회들이 줄을 이었다. 한국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지난 일요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있었던 피아니스트 백건우씨의 연주회는 메시앙 음악의 ‘넓이와 깊이’를 생생하게 보여준 수연(秀演)이었다. 오늘 메시앙 얘기를 꺼내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바로 그 연주회에서 받은 감흥이 여전히 크기 때문이다.

백씨는 메시앙의 ‘아기 예수를 바라보는 20개의 시선’을 연주했다. 2시간이 조금 넘는 연주. 하지만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20개의 시선’은 피아노 한 대로 그려낸 우주적 장관(壯觀)이었다. 백씨의 피아노는 섬세함과 격렬함,
명상과 즐거움을 빼어나게 직조했으며, 성모의 자장가처럼 부드럽게 울려나오던 피아노의 음향은 어느덧 거대한 태풍으로 변모해 몸과 마음을 후려쳤다. 이거야말로, ‘꼼짝할 수 없게 만드는 음악’ 아닌가.

그 연주회장에 피아니스트이자 음악평론가인 김순배씨와 동행한 것은 행운이었다. 김씨가 메시앙 연구로 박사학위
논문을 썼다는 것도 그날 처음 알았다. 연주회의 커튼콜까지 완전히 끝난 후, 맥이 탁 풀린 모습으로 “정신없이 두들겨 맞은 것 같네요”라고 말하자, 김씨가 이렇게 ‘진단’했다. “이 음악이 표현하고 있는 세계가 워낙 방대해요. 인간성과 신성(神性)을 동시에 오가잖아요. 음역도 위·아래를 극단적으로 오가면서, 그야말로 극한적인 ‘대비’를 보여주고 있어요. 또 정신적이고 영적인 세계가 소리로 표현됐을 때, 인간의 육체와 대립하는 측면이 있지 않겠어요? 그래서 몸이 얼얼한 겁니다.”

이질적인 것들, 아니, 사람들이 이질적이라고 ‘느끼고 생각하는’ 것들의 ‘융합’이야말로 20세기 작곡가 메시앙의 ‘키워드’ 중 하나가 아니었을까. 연주회가 있기 한 달 전쯤, 프랑스에 있는 백건우씨와
인터뷰를 했다. 그때 백씨는 “메시앙의 음악세계는 복합적”이라고 표현했다. “‘복합’이라는 게 어떤 의미인가”라고 묻자, 백씨는 이렇게 부연했다. “메시앙 선생은 서양뿐 아니라 동양을 끊임없이 이해하려고 했어요. 인도를 비롯한 아시아 여러나라 음악에 관심을 가졌던 분이죠. 거기에 자연과 종교까지 아우른, 굉장히 그릇이 큰 작곡가입니다.”

유사한 언급이 에드워드 사이드의 <음악은 사회적이다>에도 등장한다. 사이드는 메시앙에 대해 “확고한 ‘절충주의적 태도’를 통해 어떤 전통이나 권위로부터도 자유로울 수 있었다”고 말한다. 여기서 ‘절충’은 적당한 타협이라기보다 ‘융합’이라는 뜻에 더 가까울 성싶다. 동양과 서양, 신과 인간, 미시적 자연과 거시적 우주를 융합해 거대한 음악의 벽화를 그려낸 메시앙. 김순배씨는 지난 일요일 연주된 ‘20개의 시선’에 대해, “20세기 최고의 피아노 작품”이라고 평했다.

문학수 선임기자 sachim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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