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08-11-06 17:21:28ㅣ수정 : 2008-11-06 17:21:28
20세기 첼로의 거목. 거기까지만 얘기해도 단박에 떠오르는 얼굴이 있다. 바로 파블로 카잘스(1876~1973)다. 본인도 술회했듯 “첼로보다 별로 크지 않은 키”에 두툼한 손을 가진 20세기 첼로의 제왕. 그와 동시대, 혹은 그의 사후에도 숱한 첼리스트가 명멸했지만, 카잘스만한 존재감으로 여지껏 숭앙받는 인물은 찾기 힘들다. 왜일까? 마침 국내 한 음반사에서 카잘스의 명연을 10장의 CD에 담아 ‘파블로 카잘스 스페셜 에디션’을 내놨다. 스테레오 이전에 녹음돼 세월의 때가 뿌옇게 낀 음반들이지만, 아흔살 넘어서도 연주를 멈추지 않았던 카잘스의 지칠 줄 모르는 열정과 거친 숨소리가 고스란히 들린다.
소문난 음악애호가인 소설가 송영 선생은 <바흐를 좋아하세요?>라는 책에서 이렇게 썼다. ‘음반도 귀하고 그것을 들려주던 기기도 귀하고 정보조차 귀하던 시절, 나는 어느 조그만 음악실 문 밖에서 무반주 첼로 모음곡 6번을 처음 들었다. 파블로 카잘스의 연주라는 걸 뒤에 알았다. 문 밖에 선 채로 음악이 끝날 때까지 들었다.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몇달 동안 이 음악의 선율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길을 걸을 때나 남과 마주 앉아 얘기를 나눌 때나 심지어 식사를 하는 동안에도 귓가에 맴돌았다.’
만약 그 연주의 주인공이 카잘스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다면 어땠을까? 모리스 장드롱이나 안너 빌스마였다면, 아니면 미샤 마이스키나 요요마였다면? 그래도 그렇게 강렬하게 마음을 사로잡았을까. 아마 아니었을 것이다. 물론 그들도 각자의 스타일로 일가를 이뤘음에 분명하지만, 카잘스처럼 꼼짝없이 사람을 붙들어매진 못했을 것이다.
카잘스의 힘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스페인 카탈루냐의 시골마을 벤드렐에서 보낸 어린 시절. 카잘스 음악의 내밀한 에너지는 그때 이미 시작됐던 것은 아닐까? 시골 성당 오르가니스트였던 아버지. 그는 어린 아들에게 음악과 피아노를 가르쳤지만, 성당에서 오르간을 연주할 수 있는 정도면 족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아들이 목수가 되거나 장사를 하길 바랐다. 어린 파블로의 생각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열한명의 아이 가운데 일곱명이 태어나면서 죽었던 가난한 집안의 아들. 본인도 탯줄에 목이 감긴 채 태어나 거의 죽을 뻔했던 그 아이는, 어서 어른이 돼 집안을 돌보는 게 자기 몫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모친은 달랐다. 파블로에게 첼로를 시키겠다고 고집하는 어머니와 그걸로는 먹고 살 수 없다는 아버지는 빈번히 부딪혔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아들의 심정은 어땠을까? 결국 이긴 건 어머니였다. 운좋게 후원자들을 만난 카잘스는 바르셀로나와 마드리드에서 몇년간 첼로를 공부했고, 아들의 영원한 지지자인 어머니와 함께 프랑스 파리로 갔다. 하지만 거기서 모자를 기다리고 있던 건 낭만이 아니라 끔찍한 궁핍이었다. 카잘스는 훗날 “당시의 거처는 헛간이나 다름없었다”고 회고했다. 93세의 카잘스가 자신의 삶을 회고한 <나의 기쁨과 슬픔>(앨버트 칸 엮음)의 한 대목을 요약하자면 이렇다.
어머니는 어딘가로 돈을 벌러 나갔어요. 삯바느질거리를 얻어 오셨지요. 나도 필사적으로 일거리를 찾았어요. 샹젤리제의 음악홀에서 하루에 4프랑을 받고 연주했지요. 그곳까진 꽤 멀었어요. 전차삯이 15상팀이었는데, 나는 매일 첼로를 들고 걸어 다녔어요. 어느 몹시 추운 겨울날, 난 심하게 앓았지요. 일을 하러 갈 수 없었어요. 어머니는 더 늦게까지 바느질을 하셨지요. 하루는 집에 들어오시는 어머니의 모습이 이상했어요. 절망스럽게도! 아름답고 길던 검은 머리카락이 보이지 않았어요. 어머니는 “신경쓰지 마라, 머리카락은 다시 자라는 거야”라고 말씀하셨지요.
그래서 카잘스는 ‘목숨’을 걸고 첼로를 켰을 것이다. 3년 후 다시 파리를 찾은 23세의 카잘스. 그의 앞에는 마침내 빛나는 성공이 기다리고 있었다. 파리 음악계의 거장 라무뢰(1834~99) 앞에서 랄로의 ‘첼로 협주곡’을 처음 연주하던 순간, 그것이 바로 카잘스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절뚝거리며 다가와 카잘스를 끌어안은 라무뢰는 눈물까지 글썽이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여보게, 자네는 정말 특별하군. 다음달 나와 연주하게 될 걸세.” 연주회가 열린 것은 19세기가 막을 내리던 1899년 12월17일. 카잘스는 단 한번의 연주로 ‘20세기 최고의 첼리스트’라는 후세의 평가를 예약했다. 그리고 라무뢰는 4일 후 타계했다. 서두에 언급한 ‘파블로 카잘스 스페셜 에디션’은 카잘스의 주요 녹음을 간추린 1000세트 한정판. 카잘스 애호가라면 구입을 서두르는 것이 좋겠다.
문학수 선임기자 sachimo@kyunghyang.com
20세기 첼로의 거목. 거기까지만 얘기해도 단박에 떠오르는 얼굴이 있다. 바로 파블로 카잘스(1876~1973)다. 본인도 술회했듯 “첼로보다 별로 크지 않은 키”에 두툼한 손을 가진 20세기 첼로의 제왕. 그와 동시대, 혹은 그의 사후에도 숱한 첼리스트가 명멸했지만, 카잘스만한 존재감으로 여지껏 숭앙받는 인물은 찾기 힘들다. 왜일까? 마침 국내 한 음반사에서 카잘스의 명연을 10장의 CD에 담아 ‘파블로 카잘스 스페셜 에디션’을 내놨다. 스테레오 이전에 녹음돼 세월의 때가 뿌옇게 낀 음반들이지만, 아흔살 넘어서도 연주를 멈추지 않았던 카잘스의 지칠 줄 모르는 열정과 거친 숨소리가 고스란히 들린다.
소문난 음악애호가인 소설가 송영 선생은 <바흐를 좋아하세요?>라는 책에서 이렇게 썼다. ‘음반도 귀하고 그것을 들려주던 기기도 귀하고 정보조차 귀하던 시절, 나는 어느 조그만 음악실 문 밖에서 무반주 첼로 모음곡 6번을 처음 들었다. 파블로 카잘스의 연주라는 걸 뒤에 알았다. 문 밖에 선 채로 음악이 끝날 때까지 들었다.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몇달 동안 이 음악의 선율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길을 걸을 때나 남과 마주 앉아 얘기를 나눌 때나 심지어 식사를 하는 동안에도 귓가에 맴돌았다.’
만약 그 연주의 주인공이 카잘스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다면 어땠을까? 모리스 장드롱이나 안너 빌스마였다면, 아니면 미샤 마이스키나 요요마였다면? 그래도 그렇게 강렬하게 마음을 사로잡았을까. 아마 아니었을 것이다. 물론 그들도 각자의 스타일로 일가를 이뤘음에 분명하지만, 카잘스처럼 꼼짝없이 사람을 붙들어매진 못했을 것이다.
카잘스의 힘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스페인 카탈루냐의 시골마을 벤드렐에서 보낸 어린 시절. 카잘스 음악의 내밀한 에너지는 그때 이미 시작됐던 것은 아닐까? 시골 성당 오르가니스트였던 아버지. 그는 어린 아들에게 음악과 피아노를 가르쳤지만, 성당에서 오르간을 연주할 수 있는 정도면 족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아들이 목수가 되거나 장사를 하길 바랐다. 어린 파블로의 생각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열한명의 아이 가운데 일곱명이 태어나면서 죽었던 가난한 집안의 아들. 본인도 탯줄에 목이 감긴 채 태어나 거의 죽을 뻔했던 그 아이는, 어서 어른이 돼 집안을 돌보는 게 자기 몫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모친은 달랐다. 파블로에게 첼로를 시키겠다고 고집하는 어머니와 그걸로는 먹고 살 수 없다는 아버지는 빈번히 부딪혔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아들의 심정은 어땠을까? 결국 이긴 건 어머니였다. 운좋게 후원자들을 만난 카잘스는 바르셀로나와 마드리드에서 몇년간 첼로를 공부했고, 아들의 영원한 지지자인 어머니와 함께 프랑스 파리로 갔다. 하지만 거기서 모자를 기다리고 있던 건 낭만이 아니라 끔찍한 궁핍이었다. 카잘스는 훗날 “당시의 거처는 헛간이나 다름없었다”고 회고했다. 93세의 카잘스가 자신의 삶을 회고한 <나의 기쁨과 슬픔>(앨버트 칸 엮음)의 한 대목을 요약하자면 이렇다.
어머니는 어딘가로 돈을 벌러 나갔어요. 삯바느질거리를 얻어 오셨지요. 나도 필사적으로 일거리를 찾았어요. 샹젤리제의 음악홀에서 하루에 4프랑을 받고 연주했지요. 그곳까진 꽤 멀었어요. 전차삯이 15상팀이었는데, 나는 매일 첼로를 들고 걸어 다녔어요. 어느 몹시 추운 겨울날, 난 심하게 앓았지요. 일을 하러 갈 수 없었어요. 어머니는 더 늦게까지 바느질을 하셨지요. 하루는 집에 들어오시는 어머니의 모습이 이상했어요. 절망스럽게도! 아름답고 길던 검은 머리카락이 보이지 않았어요. 어머니는 “신경쓰지 마라, 머리카락은 다시 자라는 거야”라고 말씀하셨지요.
그래서 카잘스는 ‘목숨’을 걸고 첼로를 켰을 것이다. 3년 후 다시 파리를 찾은 23세의 카잘스. 그의 앞에는 마침내 빛나는 성공이 기다리고 있었다. 파리 음악계의 거장 라무뢰(1834~99) 앞에서 랄로의 ‘첼로 협주곡’을 처음 연주하던 순간, 그것이 바로 카잘스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절뚝거리며 다가와 카잘스를 끌어안은 라무뢰는 눈물까지 글썽이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여보게, 자네는 정말 특별하군. 다음달 나와 연주하게 될 걸세.” 연주회가 열린 것은 19세기가 막을 내리던 1899년 12월17일. 카잘스는 단 한번의 연주로 ‘20세기 최고의 첼리스트’라는 후세의 평가를 예약했다. 그리고 라무뢰는 4일 후 타계했다. 서두에 언급한 ‘파블로 카잘스 스페셜 에디션’은 카잘스의 주요 녹음을 간추린 1000세트 한정판. 카잘스 애호가라면 구입을 서두르는 것이 좋겠다.
문학수 선임기자 sachim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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