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08-11-27 17:39:15ㅣ수정 : 2008-11-27 17:39:30
지휘자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1908~89)은 나치 당원이었다. 2차대전 종전 후, 그는 자신의 나치 전력에 대한 비난이 쏟아지자 이렇게 ‘해명’한 적이 있다. “나는 1935년 (독일) 아헨에서 음악총감독이 되려할 때 당원이 되었다. 내가 숙원해온 목표를 바로 눈앞에 둔 3일 전에 시장이 와서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아직 당원이 아니지요? 지역구 당책임자에 따르자면, 이 자리는 당원이 아니고는 맡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나는 서명했다.” 카라얀은 그렇게, ‘나는 1935년에 어쩔 수 없이 나치에 가입했다’고 변명했다. 현재 유통되고 있는 카라얀에 대한 허다한 자료들도 이 ‘술회’를 대체로 의심없이 받아들인다. 일본의 유명한 음악전문 출판사인 ‘음악지우’(音樂之友)에서 90년 펴낸 <클래식의 거장들>도 카라얀이 아헨 시대에 나치에 입당했다고 서술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거짓말이다.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의 상류층 집안에서 태어난 카라얀은 - 그의 아버지 에른스트 폰 카라얀은 오스트리아의 국립보건국 국장이었다 - 1933년 4월에 이미 나치당에 가입했다. 오스트리아가 독일에 합병되기 1년여 전이었다. 당시 오스트리아는 독일, 이탈리아와 마찬가지로 여러 정파와 이념이 뒤섞인 혼란한 정국 속에 있었다. 카라얀의 잘츠부르크 나치당 당원번호는 ‘1607525’. 그는 한 달 후 독일의 울름(Ulm) 지역 나치당에도 가입한다. 이때의 당원번호는 ‘3430914’였다.
카라얀은 27세에 아헨극장 음악총감독 자리에 오른 후 승승장구한다. 그는 2년 뒤 빈 국립오페라극장에 데뷔했고 이어서 베를린필하모닉과 베를린 국립오페라극장의 지휘봉을 차례로 든다. 당대의 거목 푸르트벵글러(1886~1954)가 나치에 협력하면서도 일정한 거리를 뒀던 것과 달리, 카라얀은 더욱 적극적으로, 다시 말해 ‘나치의 일원’으로서 출세 가도를 달린다. 광기 어린 독재자 히틀러는 이 젊은이의 지휘를 ‘별 볼 일 없다’고 생각했지만, 냉철한 전략가였던 문화선전부장관 괴펠스의 생각은 달랐던 듯하다. 그는 출세에 눈먼 이 젊은 지휘자야말로 나치의 문화정책을 효율적으로 실현할 수 있는 ‘뛰어난 인재’라고 여겼다.
음악은 과연 정치와 무관한가? 이른바 ‘음악의 자율성’은 기회주의자들에게 훌륭한 자기 변호의 수단이 되기도 한다. 카라얀도 그랬다. 그는 독일이 전쟁에서 패망한 직후, 자신을 심문하던 미군 장교에게 “나는 단지 음악을 했을 뿐”이라며 스스로를 변호한다. 이 ‘순수함’은 약발을 톡톡히 받았다. 당시의 미군 장교는 “음악이 생존을 의미하는, 음악만이 중요한 광신자”라는 보고를 올렸고, 카라얀은 2년 후 연주활동 금지에서 완전히 해제된다.
아이러니하게도, 나치 당원이었던 카라얀의 음악 권력은 종전 후 더욱 확고해진다. 푸르트벵글러는 어느덧 ‘지는 해’였고 성품이 괴팍한 첼리비다케(1912~96)는 정치에 서툴렀다. 1954년 베를린필의 수장이었던 푸르트벵글러가 세상을 떠나자, 카라얀은 이듬해에 그 바통을 이어받으면서 ‘종신지휘자’의 자리에 올랐다. 그는 베를린필과 빈필 등 공공자금으로 운영되던 연주단체의 입장료를 올려 연주회 ‘문턱’을 높였으며, 57년부터 시작된 스테레오 녹음 시대를 맞아 매끄럽고 세련된 사운드의 음반을 잇달아 발표했다. 그때부터 20세기가 거의 막을 내릴 때까지, ‘카라얀의 시대’는 계속됐다.
20세기 음악계의 최고 권력자였던 카라얀. 그는 베토벤과 브람스, 바그너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등을 즐겨 연주했다. 그는 대중이 좋아할 만한 음악을 반복적으로 연주했으며, 정통 독일 레퍼토리의 범주를 거의 벗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음악적 폭이 좁다든가, 청중의 입맛에만 맞춘다는 비판도 제기됐다. 카라얀이 베를린필을 지휘해 녹음했던 벨라 바르토크(1881~1945)의 음악은 어쩌면 그 비판에 대한 일종의 ‘알리바이 증명’이었는지도 모른다. 카라얀은 바르토크의 ‘현악기, 타악기와 첼레스타를 위한 음악’을 60년에, ‘관현악을 위한 협주곡’을 65년에 녹음했다. 하지만 나치의 광풍에 쫓겨 미국으로 건너갔던 헝가리의 작곡가 바르토크, 가난과 백혈병에 시달리다 뉴욕에서 객사한 그의 음악을 카라얀의 지휘로 듣다니! 이 어찌 불편하지 않겠는가.
문학수 선임기자 sachimo@kyunghyang.com
지휘자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1908~89)은 나치 당원이었다. 2차대전 종전 후, 그는 자신의 나치 전력에 대한 비난이 쏟아지자 이렇게 ‘해명’한 적이 있다. “나는 1935년 (독일) 아헨에서 음악총감독이 되려할 때 당원이 되었다. 내가 숙원해온 목표를 바로 눈앞에 둔 3일 전에 시장이 와서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아직 당원이 아니지요? 지역구 당책임자에 따르자면, 이 자리는 당원이 아니고는 맡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나는 서명했다.” 카라얀은 그렇게, ‘나는 1935년에 어쩔 수 없이 나치에 가입했다’고 변명했다. 현재 유통되고 있는 카라얀에 대한 허다한 자료들도 이 ‘술회’를 대체로 의심없이 받아들인다. 일본의 유명한 음악전문 출판사인 ‘음악지우’(音樂之友)에서 90년 펴낸 <클래식의 거장들>도 카라얀이 아헨 시대에 나치에 입당했다고 서술하고 있다.
카라얀은 27세에 아헨극장 음악총감독 자리에 오른 후 승승장구한다. 그는 2년 뒤 빈 국립오페라극장에 데뷔했고 이어서 베를린필하모닉과 베를린 국립오페라극장의 지휘봉을 차례로 든다. 당대의 거목 푸르트벵글러(1886~1954)가 나치에 협력하면서도 일정한 거리를 뒀던 것과 달리, 카라얀은 더욱 적극적으로, 다시 말해 ‘나치의 일원’으로서 출세 가도를 달린다. 광기 어린 독재자 히틀러는 이 젊은이의 지휘를 ‘별 볼 일 없다’고 생각했지만, 냉철한 전략가였던 문화선전부장관 괴펠스의 생각은 달랐던 듯하다. 그는 출세에 눈먼 이 젊은 지휘자야말로 나치의 문화정책을 효율적으로 실현할 수 있는 ‘뛰어난 인재’라고 여겼다.
음악은 과연 정치와 무관한가? 이른바 ‘음악의 자율성’은 기회주의자들에게 훌륭한 자기 변호의 수단이 되기도 한다. 카라얀도 그랬다. 그는 독일이 전쟁에서 패망한 직후, 자신을 심문하던 미군 장교에게 “나는 단지 음악을 했을 뿐”이라며 스스로를 변호한다. 이 ‘순수함’은 약발을 톡톡히 받았다. 당시의 미군 장교는 “음악이 생존을 의미하는, 음악만이 중요한 광신자”라는 보고를 올렸고, 카라얀은 2년 후 연주활동 금지에서 완전히 해제된다.
아이러니하게도, 나치 당원이었던 카라얀의 음악 권력은 종전 후 더욱 확고해진다. 푸르트벵글러는 어느덧 ‘지는 해’였고 성품이 괴팍한 첼리비다케(1912~96)는 정치에 서툴렀다. 1954년 베를린필의 수장이었던 푸르트벵글러가 세상을 떠나자, 카라얀은 이듬해에 그 바통을 이어받으면서 ‘종신지휘자’의 자리에 올랐다. 그는 베를린필과 빈필 등 공공자금으로 운영되던 연주단체의 입장료를 올려 연주회 ‘문턱’을 높였으며, 57년부터 시작된 스테레오 녹음 시대를 맞아 매끄럽고 세련된 사운드의 음반을 잇달아 발표했다. 그때부터 20세기가 거의 막을 내릴 때까지, ‘카라얀의 시대’는 계속됐다.
20세기 음악계의 최고 권력자였던 카라얀. 그는 베토벤과 브람스, 바그너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등을 즐겨 연주했다. 그는 대중이 좋아할 만한 음악을 반복적으로 연주했으며, 정통 독일 레퍼토리의 범주를 거의 벗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음악적 폭이 좁다든가, 청중의 입맛에만 맞춘다는 비판도 제기됐다. 카라얀이 베를린필을 지휘해 녹음했던 벨라 바르토크(1881~1945)의 음악은 어쩌면 그 비판에 대한 일종의 ‘알리바이 증명’이었는지도 모른다. 카라얀은 바르토크의 ‘현악기, 타악기와 첼레스타를 위한 음악’을 60년에, ‘관현악을 위한 협주곡’을 65년에 녹음했다. 하지만 나치의 광풍에 쫓겨 미국으로 건너갔던 헝가리의 작곡가 바르토크, 가난과 백혈병에 시달리다 뉴욕에서 객사한 그의 음악을 카라얀의 지휘로 듣다니! 이 어찌 불편하지 않겠는가.
문학수 선임기자 sachim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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