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08-12-25 17:26:59ㅣ수정 : 2008-12-25 17:26:59
차이코프스키의 교향곡은 겨울에 들으면 더욱 제맛이다. 베토벤의 7번과 드보르자크의 8번 교향곡이 여름에 한층 어울리는 것처럼, 음악에는 나름대로 계절과의 어울림이 있는 법이다. 그런 의미에서 차이코프스키의 교향곡은 ‘겨울의 음악’이다. 아예 ‘겨울날의 몽상’(Winter Daydreams)이라 이름 붙인 1번부터 ‘비창’(悲愴)으로 불리는 6번까지, 어느 곡에서건 가슴 시린 북국의 정취를 물씬 풍긴다.
러시아적 비애감과 때때로 폭발하는 광기 어린 열정. 차이코프스키의 교향곡은 번호가 없는 ‘만프레드 교향곡’까지 포함해 모두 7곡이다. 그중에서도 백미로 꼽히는 곡은 4, 5, 6번. 교향곡으로서의 구조가 취약하고 선율이 지나치게 감상적이라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이 세 곡은 러시아 교향곡의 전형을 이뤄낸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잿빛 우울은 그의 천성과도 같았다. 우랄 산맥 서쪽의 보트킨스크. 차이코프스키의 고향이었던 그 회색빛 광산촌이 그런 성정을 더욱 부채질했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그는 소심하기 이를 데 없는 사람이었다. 이를테면 1877년 가을, 모스크바강에서 벌어졌던 자살 소동은 이 ‘우울한 소심남’의 성품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10월 초였다. 차이코프스키는 슈만이 라인강에 몸을 던졌던 것과는 달리, 강물 속으로 풍덩 뛰어들지 않았다. 그는 물이 허리까지 차오르는 지점에 이르자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조용히 얼어 죽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그 동사(凍死) 기도라는 것도 본인의 말일 뿐, 실제로 그가 자살을 결행했던 것인지는 알 길이 없다. 어쨌든 차이코프스키는 구조됐고 동생의 손에 이끌려 병원에 입원했다.
결혼식을 올린 지 두 달쯤 된 아내 밀류코바와의 파경. 그것이 자살 기도의 원인으로 알려져 있다. 차이코프스키에 관한 허다한 자료에서, 9년 연하의 아내 밀류코바는 거의 ‘악녀’로 그려진다. 음악을 이해하지 못했고 신경질적이었으며 심지어 저속하기까지 했다는 등, 그녀에게 퍼부어지는 비난은 꽤나 극단적이다. 하지만 왠지 석연치 않다. 늘 우울하고 예민했던 남자, 동성애 기질까지 갖고 있던 차이코프스키는 과연 파경의 희생자이기만 했을까. 게다가 자살 소동 1년 전, 차이코프스키는 부유한 미망인 폰 메크 부인과 묘한 관계를 맺었다. 표면상 그것은 예술가와 후원자의 ‘스폰서십’이었지만, 차이코프스키와 그녀가 13년간 주고 받은 1200여통의 편지들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다.
교향곡 4번은 바로 이 무렵에 쓰여졌다. 걸작으로 분류되는 세 곡의 교향곡 가운데 가장 드라마틱하고 열정적인 곡. 아내를 피해 이탈리아로 떠난 차이코프스키가 산레모 바닷가에서 오케스트레이션을 완성한 교향곡이다. 악보 머리에 등장하는 “나의 가장 친한 친구”는 바로 폰 메크 부인. 그녀와의 야릇한 관계가 차이코프스키의 창작열을 자극했음을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다. 앞서 작곡한 1~3번과 확연히 구별되는 완성도. 시작부터 격렬하게 포효하는 1악장과 비애감 가득한 2악장이 특히 매혹적이다.
그로부터 10년 뒤 작곡했던 5번. 차이코프스키는 이 곡에서 러시아풍의 애상보다 서구적 낭만주의의 경향을 짙게 보인다. 광포한 열정과 비장미 넘치는 선율이 잦아들면서 한층 정갈하고 산뜻해졌다. 특히 왈츠풍의 3악장이 그렇다. 또 5년 후 세상에 나온 6번 ‘비창’. 아름다운 선율과 정교한 오케스트레이션으로 차이코프스키 교향곡의 정점에 서 있는 이 작품은 유감스럽게도 유작이 되고 말았다. 차이코프스키는 이 곡을 직접 지휘해 초연하고는 9일 후 갑자기 눈을 감았다. 사인은 콜레라. 하지만 동성애가 발각돼 법원으로부터 자살을 강요받았다는 설도 있다.
흔히 추천되는 4·5번 레코딩은 므라빈스키와 레닌그라드 필하모닉의 연주다. 이와 더불어 스베틀라노프가 지휘하는 소련 국립관현악단의 실황도 놓치기 아깝다. 1990년 5월24일 도쿄 산토리홀에서 있었던 연주. 일본의 포니캐년에서 나왔다. 1주일 후 같은 장소에서 있었던 5번 실황도 마찬가지다. 4번보다 오히려 더 짙은 쾌감이 느껴지는 명연이다. 6번 ‘비창’은 키릴 콘드라신이 모스크바 필하모닉을 지휘한 멜로디아 음반을 1순위로 권한다. 예리하게 가슴을 파고드는 현악기군이 단연 압권이다.
문학수 선임기자 sachim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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