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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속에 노닐다

월경을 꿈꾸던 여행자, ‘낭만’의 문을 열다

“겨우 이것뿐인가?”라고 질문하고, 새로운 세계를 찾아 여행할 권리. 소설가 김연수의 산문집 ‘여행할 권리’(창비)의 첫 페이지에 그 짧은 문장이 깃발처럼 걸려 있다. 책을 읽기 전에 심드렁하게 지나쳤던 한 줄의 글귀였는데, 300쪽 가량의 책을 순식간에 다 읽고 들여다보니, 이거, 음미할수록 묘미가 있다. 그에게 ‘여행’이라는 행위는 물리적 공간의 이동이 아니라 정신의 월경(越境)과도 같다. ‘겨우 이것뿐인가’라고 회의하면서 더 넓고 높은 차원으로 자신의 존재를 옮겨보려고 몸부림치는 것. 그래서 이 소설가는, 30년대의 작가 이상과 1950~60년대의 시인 김수영을 ‘여행자’의 전범(典範)으로 여긴다.

이상은 1937년 도쿄 진보초오의 ‘꼬부라진 뒷골목 이층 골방’(김기림의 회고)에서 숨졌다. 그는 동시대의 시인 김기림에게, 프랑스 파리까지 한번 가보자고 언약했지만, 그 행로의 중간에서 결국 세상을 등졌다. 김수영은 어땠는가. 그는 퇴락한 50년대 모더니즘을 바라보며 ‘겨우 이것뿐인가?’라며 회의하다가, 독하게 신경질을 부리며 '들큰한 카페'를 빠져나왔다. 그는 찬바람 부는 광장에서 ‘시여, 침을 뱉어라’라고 외쳤다. 결국 정신의 월경을 꿈꾸는 여행은 그렇게 더 넓고 높은 곳에서 찬바람을 맞는 것일 테다. 그러다가 때로 목숨을 잃기도 하는 것일 게다. 진보의 길을 가고자 하는 순수한 개인의
운명이란 때때로 그렇게 가혹할 때가 많지 않던가. 

베토벤도 월경을 꿈꿨다. 100년의 세월을 버텨온 고전주의가 진부의 늪에 빠져 허우적대던 19세기의 벽두. 1802년 10월에 베토벤은 오스트리아 빈 교외의 조용한 마을 하일리겐슈타트에 있었다.
귓병은 점점 악화돼 치유불능 판정을 받은 상태였다. 당시의 베토벤은 ‘이게 아닌데’라는 음악적 회의에 부딪혀 있었고, 원인조차 알 수 없는 난치병에 시달리며 차라리 죽음을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 유명한 하일리겐슈타트의 유서가 바로 이때 쓰여진다. 동생에게 작별을 고하는 편지 형식의 유서. “이대로 죽는다 해도 후회는 없다. 죽음이 나를 끝없는 고뇌에서 해방시켜 줄 테니.”

그렇게 막장까지 갔던 베토벤은 죽지 않았다. 대신 그는 '답답한 고전'의 울타리를 훌쩍 뛰어넘으며 월경했다. 그것이 바로 교향곡 3번 ‘에로이카’. 바야흐로 베토벤 음악사의 중기(中期)로 거론되는 새로운 ‘낭만’의 시대가 이로부터 환하게 열린다. 1803년 여름에 본격적으로 착수해 이듬해 봄에 완성한 이 ‘괴물’ 같은 교향곡은, 근대음악사에 ‘벼락처럼 떨어진 축복’과도 같았다. 베토벤 이전의 누구에게서도 볼 수 없었던 장대한 규모, 격렬하게 부딪히는 긴장과 이어지는 이완. 그것은 ‘이제 음악이 가야 할 길이 바뀌었다’는 선언과도 같았다. 베토벤은 귀족의 비위를 맞추던 산뜻한 선율과 형식을 파괴했으며, 그리하여 음악은 그 자체로 묵직한 존재감을 얻었다. 베토벤은 이 곡을 스스로 지휘해 초연했는데, 당시의 청중들은 틀림없이 ‘불편’했을 것이다. 

푸르트뱅글러가 빈필하모닉을 지휘한 52년
녹음(EMI)은 ‘에로이카’를 거론하면서 빠뜨릴 수 없는 역사적 명연이다. 낭만의 문을 활짝 열어젖힌 걸작을 또 한 명의 낭만주의자가 지휘한다. 언제 들어도 가슴을 벅차게 하는 연주다. 만약 이 녹음이 너무 오래된 것이라 탐탁지 않다면, 99년에 다니엘 바렌보임이 베를린 슈타츠카펠레를 지휘한 녹음(Teldec)을 선택해도 좋다. 카라얀이 베를린필을 지휘한 77년 녹음(DG), 카를로 마리아 줄리니와 LA필하모닉(DG), 솔티와 시카고 심포니(데카)도 후회없는 선택이 될 듯하다. 칼 뵘이 베를린필을 지휘한 60, 70년대 연주는 신뢰할 만한 겸손함을 내포하고 있지만, 왠지 단단한 에너지가 느껴지지 않는다.  

문학수 선임기자 sachimo@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