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09-04-16 17:29:05ㅣ수정 : 2009-04-16 17:29:07
오늘은 재즈 색소폰 연주자 스탄 게츠의 이야기로 문을 열어야겠다. 1991년 3월3일부터 6일까지, 그는 덴마크 코펜하겐의 몽마르트르 클럽에서 연주했다. 세상을 떠나기 정확히 석달 전이었다. 당시 그는 골수까지 쳐들어온 암과 싸우고 있었다.
스탄 게츠는 64세로 타계했고, 그날 몽마르트르에서 함께 연주했던 피아니스트 캐니 배런(66)은 유작 앨범에 수록한 글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그가 얼마나 야위었는지…. 그는 자신의 솔로 때마다 혼신을 다했다. 그러나 솔로가 끝날 때마다, 나는 그가 얼마나 힘겨워하는지 느낄 수 있었다. … 어쩌면 고통 때문이었을지도 모르지만, 그날의 음악은 사실적이고, 정직하고, 아름다웠다.”
분분히 떨어지는 꽃잎을 보면서 떠오르는 또 한 명의 음악가. 스탄 게츠가 마지막 에너지를 그렇게 연소시켰던 것처럼, 러시아 출신의 명지휘자 키릴 콘드라신도 음악과 함께 산화했다. 81년 3월6일,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였다. 그날 북독일방송교향악단의 지휘봉을 들기로 예정됐던 이는 클라우스 텐슈테드. 하지만 텐슈테드의 컨디션은 최악이었다. 연주회가 거의 취소될 상황 속에서 급박하게 콘드라신에게 연락이 닿았고, 콘드라신은 앞뒤 가리지 않고 연주회장으로 내달렸다고 한다. 숨이 턱에 닿아 도착한 시각이 연주 시작 1시간 전. 콘드라신은 리허설도 거의 없이 포디엄에 서야 했다. 연주할 곡은 말러의 교향곡 1번 ‘거인’(사진)이었다.
콘드라신은 누군가? 60년부터 75년까지, 모스크바 필하모닉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지휘자. 옛소련의 국영 레이블 ‘멜로디야’와 네덜란드의 ‘필립스’를 통해 한국 애호가들에게도 널리 알려진 명장(名匠). 볼쇼이극장의 보리스 하이킨에게 지휘를 사사한 그는, 스승이 그랬던 것처럼 스케일이 크고 강렬한 다이내믹을 구사한 지휘자였다. 당국과 악단의 운영 문제로 마찰을 빚던 그는 75년 모스크바 필하모닉 음악감독직을 사퇴했고, 78년에 네덜란드로 망명해 79년 암스테르담 콘서트헤보우의 지휘자로 취임했다. 그래서 소련 시절의 연주는 ‘멜로디야’에서, 네덜란드 망명 후의 연주는 주로 ‘필립스’에서 나왔다. 어느 것 하나 놓치기 아까운 수작들이 대부분이다.
어쨌든 ‘대타’로 무대에 섰던 암스테르담 콘서트홀에서, 콘드라신은 평소보다 훨씬 뜨거웠고 지휘의 템포도 빨랐다. 음반으로 기록된 당시 연주를 지금 들어보면, 다른 지휘자들의 말러 1번에 비해 뭔가 흥분한 상태로 질주한다는 느낌마저 들 정도다. 약 50분에 달하는 연주. 10년 전부터 심장병을 앓아왔던 콘드라신은 몸을 돌보지 않은 채 무서운 기세로 내달렸다. 그리고 그날 밤, 암스테르담의 한 호텔에서 눈을 감았다. 심장마비. 향년 67세였다.
스탄 게츠의 ‘People Time’처럼, 콘드라신의 말러 1번도 담담한 마음으로 마주하기 힘들다. 그럴 때 들을 수 있는 것이 멜로디야 시절의 음반들. 특히 차이코프스키의 6번 교향곡 ‘비창’은 압도적 명연이다. 면도날처럼 예리하게 가슴을 파고드는 현악기군, 그러다 마침내 화산처럼 폭발하는 관악기군의 팡파르. 이렇게 섬세하면서도 장쾌한 ‘비창’을 어디서 만날 수 있겠는가. 멜로디야 시절에 콘드라신이 가장 집중했던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전곡 녹음도, 20세기 연주사의 한 페이지를 수놓은 장관이다.
문학수 선임기자 sachim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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