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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속에 노닐다

라흐마니노프, 망명지에서 꽃핀 초인적 기교

입력 : 2009-05-14-17:42:36수정 : 2009-05-14 17:42:37

라흐마니노프(1873~1943·사진)는 1918년에 미국으로 망명했다. 조국 러시아에서 혁명이 일어난 이듬해였다. 그는 특별한 정치적 견해를 밝혔던 적은 없었지만, 귀족이라는 이유 때문에 혁명 직후의 러시아를 떠나야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조부와 부친은 차르 군대의 장교였고 어머니도 장군의 딸이었다. 10월혁명 3주 후, 라흐마니노프는 스웨덴 스톡홀름으로부터 연주 요청을 받고는 가족과 함께 기차를 탔다. 그후 다시는 고국 땅을 밟지 못했다. 스톡홀름 연주회를 마친 그는 이듬해 미국으로 망명, 세상을 떠날 때까지 러시아계 미국인으로 살았다.

 
그렇다고 라흐마니노프가 미국을 ‘자유의 땅’으로 생각하면서 동경했던 것 같지는 않다. 예컨대 그는 미국 망명 전이었던 1909년에 뉴욕에서 연주회를 치른 후, 가족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던 적이 있다. “이 정 떨어지는 나라에는 미국인들만 들끓는다. 그들은 죽을 때까지 일만 하려고 하는지, 비즈니스를 외치면서 사람을 들볶고 강행군시킨다. 나는 너무 지쳤다. 내 성격이 많이 나빠진 것 같다.”

그랬다. 미국은 라흐마니노프의 머릿속에 “끔찍한 나라”로 각인돼 있었다. 하지만 그는 1918년부터 그 땅에 발붙이고 살아야 했다. 그는 45세였고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가장이었다. 그의 곁에는 러시아를 함께 떠나온 아내와 자식들이 있었다.

‘피아니스트’ 라흐마니노프의 생애는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된다. 낯설고 물선 땅에서 그는 가족을 위해 돈을 벌어야 했다. 물론 예전에도 종종 피아노를 연주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작곡가’ 라흐마니노프의 연주였다. 하지만 사정이 달라졌다. 이제 라흐마니노프는 자신이 직접 쓴 곡뿐 아니라 베토벤과 슈베르트, 쇼팽과 그리그까지 연주해야 했다. 당연히 작곡가로서의 활동은 점차 줄어들었고, 미국 망명 후 세상을 떠날 때까지 라흐마니노프가 완성해낸 곡은 6곡에 불과했다. 그의 생애는 그렇게, 미국으로 망명했던 45세 이전과 이후로 크게 나뉜다.

그렇다면 피아니스트로 ‘전직’했던 라흐마니노프의 존재감은 과연 어느 정도였을까? 그것은 오늘날 우리가 상상하는 이상이었다. 적어도 1920~30년대의 라흐마니노프는 요제프 호프만과 쌍벽을 이루던 최고의 피아니스트였다.
손가락을 쫘악 폈을 때 손의 크기가 자그마치 30㎝에 달했던 그는 건반을 완전히 장악한 채 육중하고 화려한 연주를 선보였고, 콘서트홀의 청중은 그의 초인적 기교에 열광했다고 전해진다. 그에 대해 아르투르 루빈슈타인(1887~1982)은 이렇게 말했다. “황금색 비밀을 간직한 살아있는 피아노 음색은 가슴에서 나왔다. 나는 화려하게 건반을 질주하는 그의 손가락과 흉내내기 어려운 거대한 루바토에 홀려 시름을 잊고 빠져들어 갔다.”

그렇게 라흐마니노프는 피아니스트로서 명성을 얻고 돈도 벌었다. 그는 두 딸에게 프랑스 파리에 출판사를 차려줬고 별장도 구입했다. 하지만 과연 행복했을까? 별로 그랬을 것 같지 않다. 아마도 미국을 지겨워했던 그의 ‘러시아적’ 심성은 여전했을 것이고 작품을 쓰지 못하며 겪어야 했던 작곡가로서의 ‘갈증’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미국 망명 후 혹독한 연주 일정에 시달리면서
요통과 관절염을 끼고 살았고 늘 피로를 호소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그의 연주가 아직
녹음으로 남아 있다는 사실은 얼마나 다행스러운가? 최근 국내의 한 음반사에서 ‘라흐마니노프의 예술’(The Art of Sergey Rachmaninov)이라는 음반을 펴냈다. 모두 6장의 CD로 이뤄진 이 앨범은 1919년부터 42년까지 레코딩된 라흐마니노프의 주요 연주를 담았다.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와 협연한 ‘피아노 협주곡 1~4번’과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랩소디’, 라흐마니노프 본인이 직접 지휘봉을 들었던 ‘죽음의 섬’과 ‘보칼리제’, ‘교향곡 3번’을 만날 수 있다. 그밖에 본인이 쓴 여러 독주곡을 비롯해 쇼팽의 소나타와 녹턴, 바이올리니스트 크라이슬러와 함께 연주한 베토벤과 슈베르트의 소나타 등을 수록했다. 특히 음악평론가 김진묵씨가 단정한 문체로 써내려간 해설은 이 앨범의 또 다른 미덕이다. 자그마치 19쪽 분량으로 라흐마니노프의 생애와 음악을 상세하면서도 명확하게 짚어낸다.

문학수 선임기자
sachim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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