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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클래식 101

베토벤, 바이올린 협주곡 D장조 op.61 모차르트(좌)와 베토벤(우) [출처: 위키피디아] 베토벤과 모차르트는 열네 살 차이가 납니다. 당연히 모차르트가 연상이지요. 하지만 모차르트는 베토벤이 스물한 살이던 1791년에 사망합니다. 베토벤은 그 다음해에 오스트리아 빈으로 이주해 하이든을 사사하면서, 빈의 음악가로서 본격적인 발걸음을 내딛게 됩니다. 또 그 다음해에는 리히노프스키 공작 등 빈의 유력한 음악후원자들과 친교를 맺기 시작하지요. 이어서 스물다섯 살이 되던 1795년에 마침내 빈에서 피아니스트로 데뷔합니다. 그렇습니다. 베토벤은 선배인 모차르트가 그랬듯이, 당대의 뛰어난 피아니스트였습니다. 그러고 보면 이 두 사람이 서양음악사에서 바통을 터치하는 시기가 참으로 절묘하게 맞아떨어진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이 두 피아니스트의 스타일은 여.. 더보기
리스트, 순례의 해(Années de Pèlerinage) 피아니스트들이 가장 갖고 싶어 하는 최고의 명품 피아노는 무엇일까요? 금방 답이 나오는 질문입니다. 잘 알려져 있듯이 그 유명한 ‘스타인웨이’입니다. 하지만 스타인웨이는 20세기에 들어와서야 명성을 얻은 피아노 제조사입니다. 그 전에는, 그러니까 19세기에는 영국의 브로드우드사(社)가 유명했습니다. 스위스 사람인 브루크하르트 슈디가 1728년 런던에 설립한 회사인데요, 1770년대에 사위인 존 브로드우드가 물려받아 유럽 최강의 피아노 제조사로 키워냅니다. 정식 명칭은 ‘브로드우드 앤드 선즈’(Broadwood & Sons)입니다. 독일계 이민자인 스타이웨이가 미국 뉴욕에서 ‘스타인웨이 앤드 선즈’(Steinway & Sons)를 창업한 것이 19세기 중반의 일이니, 브로드우드사의 연혁은 그보다 100년 .. 더보기
하이든, 교향곡 94번 G장조 ‘놀람’ ‘소나타’라는 말을 많이 들어보셨지요? 고전주의 음악을 감상할 때(물론 낭만주의 음악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개념입니다. 한국에서는 자동차 모델명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요. 저도 이 차를 한 7~8년쯤 운전했던 적이 있습니다. 오늘은 음악적 개념으로서의 ‘소나타’는 무엇인지를 잠시 설명하고 넘어가도록 하지요. 사실 지금까지 ‘내 인생의 클래식 101’에서 ‘소나타’라는 용어를 직접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소나타 개념에 대해서는 자주 얘기했던 것 같습니다. 하이든이나 모차르트, 베토벤 등의 악곡을 설명하면서 ‘도입부’라든가 ‘1주제’, ‘2주제’ 등의 표현이 자주 등장했던 것이 기억나시지요? 그런 것들이 바로 ‘소나타’라는 음악적 형식을 이루는 요소들입니다. 오늘 얘기하는 것은 ‘소나타 형식’(Sonata F.. 더보기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29번 B플랫장조 ‘함머클라비어’ 에밀 길렐스(1916~1985)의 연주를 들으면서 이 글을 씁니다. 우크라이나 오데사 출신의 피아니스트. 모스크바음악원에서 겐리흐 네이가우스(1888~1964)에게 피아노를 배웠으니, 또 한 명의 러시아 출신 거장인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테르(1915~1997)와 동문(同門)입니다. 네이가우스 문하는 그야말로 러시아 피아니즘의 명가(名家)라고 할 만하지요. 피아니스트 스타니슬라프 부닌(1966~)의 할아버지이기도 한 네이가우스는 뛰어난 연주자들을 숱하게 키워낸 당대 최고의 피아노 선생이었습니다. 물론 그중에서도 리히테르와 길렐스만한 사람을 꼽기가 어렵지요. 그런데 네이가우스 학파의 상징적 존재였던 두 피아니스트의 관계는 어땠을까요? 리히테르는 한 살 아래인 길렐스에 대해 “정직한 음악가, 경이로운 피아니스트.. 더보기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23번 f단조 op.57 ‘열정’ “나는 이보다 훌륭한 음악을 모릅니다. 매일 들어도 좋을 거요. 인간이 이런 기적을 만들 수 있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낍니다. 미래는 공포의 교향곡이 아닙니다. 미래는… 베토벤입니다. 투쟁과 시련을 넘어 환희로! 미래는 자유 투쟁의 불꽃입니다.” 누가 한 말일까요? 러시아의 혁명가 레닌이 했던 말입니다. 물론 레닌이 실제로 이와 똑같이 말했는지는 확실치가 않습니다. 1963년의 소련 영화 에 등장하는, 영화 속 레닌의 대사입니다. 때는 1920년 가을, 레닌이 탄 차가 모스크바 밤거리를 달리다가 친구인 소설가 막심 고리키의 집 앞에서 멈춥니다. 그날 고리키의 집에는 피아니스트 이사이아 도브로베인도 있었습니다. 고리키가 도브로베인에게 베토벤의 ‘열정’을 연주해달라고 청하지요. 연주가 끝난 뒤 레닌이 앞에서 .. 더보기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14번 c샤프단조 ‘월광’ 베토벤은 정치적으로 공화주의자였습니다. 하지만 그가 사랑한 여인들은 하나같이 귀족 집안의 딸들이었습니다. 그것은 모차르트와 매우 다른 면모였습니다. 모차르트는 워낙 어릴 때부터 귀족들의 총애를 받았을 뿐더러 궁정에서 공주들하고 술래잡기를 하고 놀았던 귀염둥이였지요. 그러다보니 자신을 ‘유사 귀족’으로 착각했던 측면이 있습니다. 잘츠부르크의 콜로레도 대주교 밑에서 ‘음악하인’으로 일하던 시절에 “나는 식탁에서 서열이 가장 낮다”고 불평을 터트렸던 이면에는 그런 자의식이 자리해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결혼이라는 문제 앞에서 현실적이었습니다. 알려져 있다시피 그의 아내가 된 콘스탄체는 모차르트가 머물렀던 하숙집의 셋째 딸이었습니다. 모차르트는 그렇게 평민의 딸과 결혼했습니다. 음악도 그렇습니다. 모차르트의 음.. 더보기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8번 c단조 op.13 ‘비창’ “나는 베토벤과 영원히 함께 살아갈 것이다.” 피아니스트 알프레트 브렌델(82)이 40대 시절에 어떤 인터뷰에서 했던 말입니다. 당시의 브렌델은 이미 베토벤 소나타 전곡을 완주한 뒤였습니다. 그래서 음반회사와 하이든의 소나타를 차기작으로 녹음하려는 계획을 세워놓고 있던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이 피아니스트에게 최고의 음악은 언제나 베토벤이었나 봅니다. 브렌델은 그냥 입에서 나오는 대로 대충 말하는 사람이 아니지요. 그는 같은 인터뷰에서 이런 말도 합니다. “나는 지금 40대이지만 아직도 배우고 익혀야 할 것들이 무궁무진하다. (중략) 나는 언제나 베토벤의 작품에서 새로운 신비를 발견하며, 이러한 발견은 계속 이뤄져야 한다. 내가 만약 베토벤의 총체성을 성취했다는 생각이 든다면, 그처럼 슬픈 일도 없을 것 .. 더보기
모차르트, 클라리넷 협주곡 A장조 K.622 말년의 모차르트, 그래봤자 30대 초반이 조금 넘은 모차르트가 각별히 관심을 가졌던 악기로 클라리넷을 빼놓을 수 없다는 이야기는 지난번에 했습니다. 그가 왜 클라리넷을 사랑하게 됐고, 그래서 무슨 곡을 작곡했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지난 6월 3일자 에 게재돼 있습니다. 사회적으로는 악기의 개량과 발전에 영향을 받았고, 개인적으로는 클라리넷 연주자였던 안톤 슈타틀러(1753~1812)와의 우정이 계기였다는 내용을 전해 드렸습니다. 잠시 클릭해보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오늘은 그가 클라리넷을 위해 남긴, 아울러 자신의 “좋은 친구”였던 슈타틀러를 위해 작곡한 또 하나의 걸작 를 듣겠습니다. 아시다시피 이 곡은 한 편의 영화 때문에 세계적인 인기를 얻었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보자면 ‘엘비라 마디간’이라는 별명으.. 더보기
하이든, 트럼펫 협주곡 E플랫장조 시원한 음악이 필요한 때입니다. 뭐가 있을까요? 일단 떠오르는 곡이 드보르작의 교향곡 8번입니다. ‘신세계로부터’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교향곡 9번보다 유명세는 덜하지만, 4악장에서 터져 나오는 트럼펫 연주가 분수의 물줄기처럼 시원합니다. 하지만 이 곡은 다음에 듣겠습니다. 당분간 바흐에서 베토벤까지의 음악에 주로 집중할 계획입니다. 하이든(Joseph Haydn) [출처: 위키피디아] 오늘 고른 음악은 하이든의 ‘트럼펫 협주곡 E플랫장조’입니다. 역시 트럼펫 음악입니다. 이 곡은 하이든의 다음 세대 작곡가인 요한 네포무크 훔멜(Hummel, 1778~1837년)의 곡과 더불어 트럼펫 협주곡의 대표적인 걸작으로 손꼽힙니다. 하이든의 곡이 독주 파트에서 고음역이 활약이 두드러지는 것에 비해, 훔멜의 곡은 저.. 더보기
헨델, 수상음악(Water Music) HWV 348~350 우연의 일치이겠지만 바로크 시대를 수놓았던 세 명의 거장이 동갑내기입니다. 바로 바흐와 헨델, 그리고 이탈리아 태생의 하프시코드 명인이었던 도메니코 스카를라티입니다. 세 명은 모두 1685년에 태어났습니다. 바흐는 평생 독일을 떠나지 않았지만, 알려져 있다시피 헨델은 20대 중반에 런던에 정착해 40대 초반이었던 1727년에 아예 영국인으로 귀화했지요. 나폴리에서 태어난 스카를라티는 로마에서 활약하다가 포르투갈 리스본의 궁정 하프시코드 연주자이자 공주의 음악선생으로 살았습니다. 훗날 그 공주가 스페인의 페르디난드 4세와 결혼해 왕비가 되자 자신도 스페인 궁정으로 자리를 옮겼다가 결국 마드리드에서 타계하지요. 에 바흐는 여러 차례 등장했습니다. 한데 게오르그 프리드리히 헨델(1685~1759)은 아직 얼굴.. 더보기